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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러시아어: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1894년 4월 15일 ~ 1971년 9월 11일)는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소련 장관 소비에트의 정부수반을 지낸 소련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그가 통치한 기간 내내 흐루쇼프는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함께 탈스탈린화 운동에 착수하여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통치 초기에는 소련 우주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등 다소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집권 초기의 실수들을 되돌리고 쿠바 미사일 위기를 가까스로 피한 뒤 미국과의 냉전의 긴장감을 완화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하여 성공적으로 끝냈다. 그러나 미국에게 양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책은 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냈고, 결국 1964년에 크렘린 지도부는 흐루쇼프의 권력을 박탈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게 서기장직을, 알렉세이 코시긴에게 총리직을 주었다.
흐루쇼프는 1894년 러시아 제국 쿠르스크 현 칼리놉카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금속 가공 노동자로 일했으며, 러시아 내전 동안 정치지도원이 되어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볼셰비키가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라자리 카가노비치의 지원으로 소련에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스탈린의 대숙청을 도우며 우크라이나의 제1서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장군들과 스탈린 간의 소통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에 참여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권력을 잡아 《비밀 연설》이라는 연설로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정책을 특히 농업 부분에서 크게 실패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에 양보적인 정책들은 소련 내에서 흐루쇼프의 반대파들에게 힘을 실어주게 만들었다. 그 결과 결국 흐루쇼프는 1964년 10월 축출당하게 된다. 이후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던 흐루쇼프는 1971년 사망한다.- 삼제삼합점(그림)은 오늘날 폴란드 실롱스크주 미스워비체 부근 흑프솀샤강과 백프솀샤강의 합류점에 있었던 삼합점입니다. 이 삼합점은 폴란드 분할의 결과로 형성되었는데, 1871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제국 세 나라의 국경이 접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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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의 팝 가수인 에디타 구르니아크는 대한민국과 폴란드의 2002년 FIFA 월드컵 조별 예선 경기에 앞서 폴란드의 국가인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를 불렀는데, 평소보다 느린 선율로 인해 폴란드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