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타이

가이사타이(그리스어: Γαισάται)는 알프스산맥 론강 유역에 살던 갈리아인 전사 집단으로, 기원전 225년 텔라몬 전투에서 로마 공화국과 싸웠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가이사타이"란 "용병"이라는 뜻이라고 기록했다.[1] 그러나 갈리아어를 직역한 의미는 "(투창으로 무장한) 창병"이라는 뜻이었다.[2] 이는 고대 게일어에서 "무장한 자", 대전사를 의미하는 가스케다크(고대 아일랜드어: gaiscedach)와 동계다. 게일어에서 "무기"는 gaisced 인데, 이는 창을 의미하는 게(gáe)에서 비롯된 말이다.[3] 중세 아일랜드의, 왕국들로부터 독립된 무토지 유랑전사집단 피어너와의 비교도 밀접하다.[4] (cf. Latin Hastati "spearman", from hasta "spear")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 갈리아인들의 땅이었던 피케눔이 로마에 넘어가자 갈리아 키살피나보이, 인수브리 두 부족의 부족장 콘콜리타누스와 아네로에스테스가 많은 양의 돈을 걷어 가이사타이를 고용했다. 가이사타이를 고용한 갈리아인들은 로마로 진군하면서 조우한 로마군을 한 번 격파했으나,[5]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가 군대를 끌고 오자 아네로에스테스의 의견에 따라 갈리아인들은 더 싸우지 않고 전리품을 챙겨 후퇴했다. 파푸스가 이를 추격했고, 다른 집정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에트룰리아의 텔라몬에서 퇴로를 끊었다.[6] 가사이타이는 전열에 서 싸웠으며, 그들을 고용한 동맹 갈리아인들이 바지와 망토를 입은 것과 달리 벌거벗은 채 싸웠다고 한다. 이는 자신들의 자신감을 과시하고 또 의복이 덤불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7]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역시 갈리아인들 중 일부가 벗은 채 싸운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자연이 그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어서 그랬다고 한다.[8] 건장한 체격에 벌거벗은 가이사타이들의 행색과 나팔소리와 함성에 로마인들은 당황했지만, 가이사타이의 작은 방패는 로마의 투창을 막아주지 못해 결국 가이사타이는 패퇴하고 동맹 갈리아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살육되었다.[9] 콘콜리타누스는 포로로 잡혔고, 아네로에스테스는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10] 기원전 222년 인수브리의 땅에서 벌어진 클라스티디움 전투 때도 가이사타이가 고용되었지만, 이번에는 로마 기병대에 패퇴했다.[11]

플루타르코스마르켈루스 영웅전에서 텔라몬 전투 때 알프스를 넘어 온 가이사타이의 수는 3만 명이었고, 클라스티디움에서 싸운 가이사타이는 1만 명이었다고 기록했다.[1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