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영어: Princess Alice, Duchess of Gloucester, 본명은 앨리스 크리스타벨 몬태규 더글러스 스콧, 1901년 12월 25일 ~ 2004년 10월 29일)는 조지 5세와 테크의 메리의 아들이었던 글로스터 공작 헨리의 부인이다.
앨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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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 | |
글로스터 공작부인 | |
재위 | 오스트레일리아 총독부인 |
재임 | 1945년 1월 30일~1947년 3월 11일 |
군주 | 조지 6세 |
총리 | 존 커틴 프랭크 포드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01년 12월 25일 |
출생지 | 잉글랜드 런던 몬태규 하우스 |
사망일 | 2004년 10월 29일 | (102세)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궁전 |
가문 | 버클루가 |
부친 | 제7대 버클루 공작 |
모친 | 마거릿 브릿지먼 |
배우자 | 글로스터 공작 헨리 |
자녀 | 글로스터 공자 윌리엄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
묘소 | 잉글랜드 버크셔주 윈저 |
군사 경력 | |
복무 | 영국 |
복무기간 | 1939년~1998년 |
소속 | 영국 공군 영국 육군 |
근무 | 여성보조공군 알렉산드라 제국간호부대 |
지휘 | 여성보조공군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서훈 | 대영 제국 훈장[1] 로열 빅토리아 훈장[2] 바스 훈장[3] |
스코틀랜드 최대의 토지 소유자였던 제7대 버클루 공작의 딸로, 앨리스는 결혼을 통해 영국의 왕실의 일원이자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의 제수이기도 했다. 역대 영국 왕실 인물들 중 최장수한 인물이다. 또한 전 세계의 왕족 중에서도 가장 장수하여 기네스북에 올랐다.
초기 생애
앨리스 크리스타벨은 1901년 크리스마스 날 런던 화이트홀의 몬태규 하우스에서 달케이트 백작 존 몬태규 더글러스 스콧와 제4대 브래드퍼드 백작의 딸이었던 마거릿 앨리스 "몰리" 브리지맨의 셋째 딸이자 다섯째 아이로 태어났다.[4] 그녀의 형제 월터, 윌리엄, 그리고 그녀의 조카 존은 모두 보수당 의원이었다. 그녀의 사촌인 엠허스트 부인 마리안 루이자는 앨리스의 종손인 요크 공작 앤드루의 전 부인 요크 공작부인 사라의 친할머니다.
앨리스는 찰스 2세의 맏아들이지만 사생아이고, 명예혁명으로 이어지는 몇 년 동안 주요 정치인이었던 제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의 후손이었다. 앨리스는 크리스마스에 태어났기 때문에 크리스타벨이라는 중간 이름을 얻었다.[5]
앨리스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훌륭한 집들"을 여행하며 보냈다.[6] 노샘프턴셔주의 뷰튼 하우스와 덤프리스 갤러웨이의 드럼랜리그 성, 스코티시보더스의 보우힐과 멜로즈의 에일던 힐은 거의 앨리스의 본거지였다.[7][8]
14살에 거의 익사할 뻔 했던 경험은 앨리스가 매일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예리한 감각을 깨웠다.[5] 솔웨이 퍼스에서 해류에 휘말린 그녀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신에게 기도하며, 공무에 헌신하는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적을 빌었다.
다음 순간 내 발이 바위에 닿았다. 나는 일어서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나는 꽤 먼 해안으로 실려 내려갔었다. (내 왼쪽에 몇몇 집들이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그 바위들은 암초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나는 더 이상의 사고 없이 그것들을 헤치고 얕은 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 삶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그것을 어떤 유용한 목적에 바치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거나 내가 도움이 되는 것은 결코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련의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통해, 어느 날, 내가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데 공적인 의무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비밀스러운 내 서약이 존중되었다.[5][8]
앨리스는 우스터셔주 웨스트맬번에서 사립 세인트제임스 여학교에 다녔고, 후에 프랑스, 케냐, 인도로 여행을 갔다.[5] 웨스트 맬번에서 학교를 마친 후, 그녀는 "1920년 궁정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귀국하기 전까지" 파리에서 1년을 보냈다.[9] 앨리스는 스키, 승마, 사냥을 즐겼으며 수채화에도 능했다.[10][11][8] 케냐의 아처스 포스트 근처에서 그린 그녀의 그림은 오늘날 로열 컬렉션의 일부이다.[12] 1929년부터 1931년까지 1년 이상 머물렀던 케냐에서 앨리스는 해피 밸리 세트라 불리는 지역에서 거주했으며 에벌린 워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5][6]
결혼
1935년, 앨리스는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영국으로 돌아왔다.[8] 1935년 8월 앨리스는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와 약혼했다.[13] 그들은 그해 11월 6일 버킹엄궁의 개인 예배당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13] 원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훨씬 더 정교한 결혼식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1935년 10월 19일 버클루 공작이 암으로 사망하고, 국왕의 건강이 나빠진 것을 고려하여 결혼식을 좀 더 사적인 장소로 축소하기로 결정했다.[13]
앨리스의 신부 들러리는 그녀의 여동생 안젤라 몬태규더글러스스콧과 그녀의 조카 클레어 핍스, 엘리자베스 몬태규더글러스스콧, 앤 호키, 글로스터 공작의 조카인 엘리자베스 공주와 요크 공주 마거릿, 사촌 모이라 몬태규더글러스스콧, 그리고 글로스터 공작의 사촌 메리 휘틀리 여사였다. 앨리스는 홍조를 띤 웨딩드레스를 입었는데, 이 의상을 입은 영국 왕실의 신부는 그녀가 유일했다. 그녀의 가운은 훗날 미래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공주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노먼 하트넬이 디자인했다. 이 드레스는 "길고 좁은 소매, 높은 목둘레선에 인공 오렌지색 꽃의 꽃다발을 드리워 수수한 소박함"을 드러냈다.[14] 면사포는 떠도는 구름과 같은 파삭파삭한 튤로 만들어졌다.[14] 버킹엄 궁전의 개인 예배당으로 가는 길에 앨리스는 추운 날씨 때문에 "어민 담요 스톨"을 입었다.[14] 비록 그 날은 춥고 비가 내렸지만,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신혼여행을 가는 글로스터 공작 부부를 배웅하기 위해 궁전에서 기차역까지 거리에 줄지어 있었다. 앨리스는 그때부터 종종 "겨울 공주"로 불렸다.[7]
왕실 일원으로서의 삶
처음에 글로스터 공작과 공작부인은 올더샷에 있는 로열 파빌리온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글로스터 공작은 육군 참모 과정을 수강했다.[15] 1936년 12월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자 글로스터 공작은 더 많은 공공 임무를 맡기 위해 군을 떠났다.
글로스터 공작 부부는 왕실이 하사한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요크 하우스를 받았고,[9] 1938년에 그들은 노샘프턴셔에 있는 바넬 영지를 구입했다.[15] 공작부인은 두 번의 유산을 겪었고,[8] 이후 글로스터 공자 윌리엄과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낳았다.[15]
글로스터 공작과 공작부인은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공작부인의 공식석상 일정에는 1937년 10월 19일 HMS 글로스터 진수도 포함되어 있었다.[16]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공작부인은 적십자와 성 요한 기사단과 함께 일했다.[17][18] 그녀는 1939년 여성보조공군 (WAAF)의 수장이 되었고, 1940년 3월 12일 주요 관리자가 되었다.[19] 이후 앨리스는 1943년 3월 4일 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44년 8월까지 사령관을 맡았다. 1949년 여성보조공군이 여성 왕립 공군(WRAF)이 되었을 때, 앨리스는 1949년 2월 1일 새로운 조직에서 (공군 부사령관과 동급인) 공군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20] 1968년 9월 1일 앨리스는 공군 중장으로 진급했고,[21] 1990년 2월 23일 영국 공군의 대장으로 진급했다.[22] 앨리스는 또한 간호 군단의 총사령관이자 조지 6세의 왕비인 엘리자베스 왕비의 대리인이기도 했다.[18]
1945년부터 1947년까지 글로스터 공작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독으로 재임했고, 공작과 공작부인은 캔버라에서 살았다.[18][23]
글로스터 공작부인은 노샘프턴셔 연대, 제2이스트앵글리안 연대, 왕립 앵글리안 연대, 왕립 후사르, 왕립 아일랜드 레인저, 왕립수송군단과 같은 영국 육군에서 여러 부대의 명예 연대장 또는 명예 부연대장직을 받았다.[24] 그녀는 걸스데이 스쿨 신탁과 퀸 마거릿 대학의 후원자이기도 했다.[18]
1965년, 윈스턴 처칠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도중, 공작의 뇌졸중으로 인해 차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공작이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고 공작부인은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6][8] 이 사건에 대해 공작부인은 "나는 그가 잠들어서 자제력을 잃으면 핸들을 잡거나 브레이크에 발을 올려놓기 위해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스스로 졸았음에 틀림없다. 분명히 롤스는 길을 벗어나서 배추밭에서 거꾸로 뒤집어져 있었다. 헨리 왕자는 운 좋게도 열린 문밖으로 내동댕이쳐져 쐐기풀과 가시덤불 사이로 떨어졌다..."라고 썼다.[5]
1972년, 공작부인의 장남인 윌리엄 왕자는 아마추어 에어쇼 경기에 참가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25] 글로스터 공작은 아들이 죽었을 때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공작부인은 그에게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나중에 공작부인의 회고록에서는 공작부인은 말하지 않았지만 공작이 텔레비전 보도에서 윌리엄의 죽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했다.[5] 글로스터 공작은 1974년 6월 10일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26]
이후 삶
1975년 앨리스 공주는 바스 훈장 대십자 여기사로 임명된 최초의 여성이었다.[3] 1981년, 앨리스는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 공주의 회고록>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회고록을 처음으로 출판했고, 10년 뒤인 1991년 <90년의 기억>이라는 개정판을 내놓았다.
1994년, 글로스터가문이 경제적인 이유로 바넬 저택을 포기한 후, 앨리스는 바넬에서 켄싱턴 궁전으로 이사하여 현재의 글로스터 공작 부부과 함께 살았다.[27] 그녀는 98세의 나이로 공식적으로 공직에서 은퇴했다.[11] 1999년, 공작은 신체적 약함으로 인해 그의 어머니가 켄싱턴 궁의 주변 밖에서 더 이상 공공업무를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0년 7월, 공작은 또 다른 성명에서 그의 어머니가 "점점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말했다.[27]
2001년 12월, 왕실은 앨리스 공주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식을 열었다.[28] 이것은 앨리스 공주의 마지막 공식석상이었다.[28] 엘리자베스 왕비가 2002년 3월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앨리스 공주는 영국 왕실의 살아있는 최고령자가 되었다.[29] 2003년 8월 21일, 앨리스 공주는 101세 238일의 나이로 엘리자베스 왕비가 세웠던 영국 왕실 역사상 최고령자로서의 기록을 넘어섰다.[28][30] 2003년 9월 20일, 101세 269일의 나이로, 그녀는 세계 최장수 왕족으로 기네스북으로부터 인증을 받았으며, 종전의 레오니야 바리아틴스카야의 기록을 엎었다.[31]
죽음
앨리스 공주는 2004년 10월 29일 103세 생일을 57일 앞두고 켄싱턴 궁전에서 잠을 자다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28][32] 그녀가 죽은 후, 유니언 잭이 조기로 나부꼈다.[27] 그녀의 장례식은 2004년 11월 5일 윈저에 있는 세인트조지 예배당에서 거행되었고, 프로그모어의 왕실 묘지에 남편 헨리 왕자와 장남 윌리엄 왕자의 옆에 묻혔다.[17][33] 장례식에는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한 영국 왕족들이 참석했다.[17] 2005년 2월 2일 세인트 클레멘스 데인스에서 추모식이 열렸으며, 앨리스 공주의 아들과 아들의 가족, 앨리스 공주가 참여한 단체의 대표들이 참석했다.[34] 앨리스 공주가 여성공군에서 총사령관을 맡은 것을 기리기 위해 영국 공군은 추도식을 공동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