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매순

백제의 기술자

백매순(白昧淳[주 1], ? ~ ? )은 백제 후기의 노반(鑪盤) 기술자로 왜에 파견되었다. 관등은 장덕(將德)이다.[1][주 2]

백매순
白昧淳
백제장덕
군주 백제 위덕왕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출생지 미상
사망일 미상
사망지 미상
국적 백제
성별 남성

생애

백매순(白昧淳)은 588년(백제 위덕왕 35) 노반박사(鑪盤博士)로 은솔(恩率) 수신(首信), 덕솔(德率) 개문(蓋文), 나솔(那率) 복부미신(福富味身) 등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사공(寺工), 와박사(瓦博士), 화공(畵工), 서인(書人) 양고(陽古)와 함께 왜로 건너갔다.[1]

노반(鑪盤)은 노반(露盤) 또는 누반(鏤盤)이라고도 하는, 불탑의 상륜부(相輪部)를 말하는데, 노반박사(鑪盤博士)는 탑의 건립을 담당하는 주조 기술자였다.[1]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는 588년(위덕왕 35)에 당시 일본의 대신(大臣)이며 숭불론자였던 소가씨(蘇我氏)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 ~ 626년)의 요청으로, 백제국사(百濟國師) 혜총(惠總), 승려 영근(令斤), 혜식(惠寔)을 비롯하여 사공(寺工) 태량미태(太良未太)와 문고고자(文賈古子), 노반박사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 마나문노(麻奈文奴), 양귀문(陽貴文), 능귀문(㥄貴文), 석마제미(昔麻帝彌), 화공(畫工) 백가(白加) 등을 함께 파견하였다고 한다.

평가

백매순은 일본 최초의 불교 사찰이자 소가 씨(蘇我 氏)의 씨사(氏寺)로 일본 나라(奈良)시에 있는 법흥사(法興寺, 일명 비조사(飛鳥寺) 또는 원흥사(元興寺))를 함께 창건하였다.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에 전하는 노반명(露盤銘)에는 '누반사 자매순'(鏤盤師 自昧淳)[주 3]으로 기록되어 있다.[1]

그 출신에 대한 일설

몇 연구자들이 그를 이란(페르시아)계 서역에서 중국남조을 거쳐 백제에 체류했던 이란계(페르시아) 호인 (胡人)으로 보다.[2][3][4][5] 그 속에서 일본의 이란학자인 이토 기쿄(伊藤義教)가 "백매순(白昧淳)"을 "이슬이 내릴 물건"을 뜻하는 팔라비어에 바탕을 두는 조어인 "pay - mizne / pay - muzne"란 소리를 옮긴 것로 보아, 노반(露盤/鑪盤)을 나타내다고 지적한다.[6]

이란학자인 이토 기쿄(伊藤義教), 이모토 에이치(井本英一), 역사학자인 수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등이 이 이름에서 복원한 원어에 차이가 있는데, 일본으로 파견된 사공(寺工) 태량미태와 문고고자, 노반박사(鑪盤博士) 백매순, 와박사(瓦博士) 마나문노, 양귀문, 능귀문, 석마제미, 화공(畫工) 백가등 장색들 모두 이란계(페르시아) 호인로 삼는 점으로 의견이 일치한다.[2][3][4][5]

백제가 중국남조와 밀접한 교류를 가졌던 것은 동진에서 불교가 인도인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를 통해서 전해진 것으로 분명해서 또한 백제가 고구려·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 교류가 활발하고 황해를 건너는 것이 가깝다고는 지세적인 정황에 의해서 중국남조에서 일본으로 거너왔던 도래인도 많다.[7][8]양서(梁書)》열전(列傳)·동이조(東夷條)에 있는 신라에 대한 기술 "회화에은 백제인을 수반해서 통역 시킨다(語言待百済而後通焉)"고는, 중국인이 신라인과 회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원로 하는 것이 항상이었던 갓을 가리킨다.[7]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나 아랍인상인등이 진출했었어,[9] 법흥사(法興寺)의 조영에 종사한 백제 장색들도 그러한 경로를 취해서 백제에 이른 이란계(페르시아) 호인 또는 그 자손으로 보다.[2][3][4]

각주

내용주

출처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