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요

비요(費曜, ? ~ ?)는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장군이다. 한자 표기가 보통은 費曜인데 費耀,[1] 費瑤,[2] 費繇[3]로 쓰인 경우도 있다. 관서(關西)에서 복무했고 후장군까지 올랐다.

생애

220년(연강 원년) 주천군 일대에서 들고일어난 장진(張進) 등을 금성태수 소칙이 진압하였다.[4] 조진의 명령으로 비요도 가서 도왔다.[5] 221년(황초 2년)[6] 양주의 노수호(盧水胡) 이건기첩(伊健妓妾), 치원다(治元多) 등이 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장기가 양주자사로 전임되어 토벌을 맡고 비요와 하후유(夏侯儒)도 후속부대로 파견되었다. 장기는 속공과 복병을 구사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비요도 하후유보다 먼저 도착해 도움을 주었다.[7]

228년(태화 2년) 제갈량북벌을 개시하였다. 그 선봉 부대를 장합과 함께 가정(街亭)에서 분쇄하여 수포로 만들었다.[3] 섣달, 제갈량이 다시 북진해 진창성(陳倉城)이 포위당하자 조진의 명을 받아 지원군으로 달려갔다.[8] 230년 위연오의강족이 있는 남안군으로 들어갔기에 옹주자사 곽회와 아울러 양계(陽谿)에서 맞섰다가 패하였다.[2] 231년 지휘관이 사마의로 바뀌었다. 대릉, 곽회와 더불어 군사 4천 명으로 천수군 상규현(上邽縣)를 지켰는데 이곳에서 사마의를 요격하려던 제갈량의 공격을 받아 격파당했다.[9]

삼국지연의

사서가 아닌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費耀(비요)로 표기하였다. 제갈량의 제2차 북벌 때 조진의 부장으로 등장한다. 내통해온 강유를 수상히 여겨 조진에게 ‘내통이 사실이라면 조진에게 공을 돌리고 계략이라면 자신이 감당하겠다’며 본대는 기다리게 하고 자원해서 군 일부인 5만 명을 이끌고 나선다. 비요의 예상대로 함정이었고 대패해 자결한다. 제갈량과 강유는 조진을 낚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