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이 대지진
안세이 대지진(일본어: 安政の大地震)은 일본 에도 시대 후기인 안세이 시기(1850년대)에 일본 각지에서 대지진이 연발한 일을 말한다.
보통 안세이 대지진이라고 하면 1855년에 일어난 안세이 에도 지진을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1][2][3] 1년 전인 1854년에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인 안세이 도카이 지진과[4] 안세이 난카이 지진이 일어났으며[5][6] 이 시기 이후에도 1858년 히에쓰 지진,[7][8] 1856년 안세이 하치노헤 해역 지진,[9] 1854년 이가우에노 지진[10] 등 안세이 원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큰 피해를 준 대지진을 전부 묶어 안세이 대지진이라고 부른다.[11][12]
안세이 대지진을 줄여서 안세이 지진(安政地震)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 단순하게 안세이 지진이라고 하면 난카이 해곡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호에이 지진과 쇼와 시기 지진을 비교하여 안세이 도카이 지진/난카이 지진을 묶어 부를 때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13]
1854년 일어난 이가우에노 지진, 안세이 도카이 지진, 난카이 지진, 호요 해협 지진은 실제로는 안세이 이전인 가에이 7년에 일어난 지진이다. 실제로 그 당시 고문서나 일기, 가와라반에서는 "가에이 7년 갑인년"이라고 적혀 있고 지진 이후인 가에이 7년 11월 27일(양력 1855년 1월 17일)에 안세이로 개원하였으므로 "가에이 대지진"이 맞는 표현이지만[14] 메이지 개원 당시 조칙에서 "게이오 4년(1868년)을 메이지 원년으로 개원한다"라고 하면서 게이오 4년 1월 1일을 소급하여 메이지 원년으로 계산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라 "간에이 7년 1월 1일을 소급하여 안세이 원년으로 되었다"라고 해석하여 "안세이 대지진"이라고 부른다.[15]
역사연표에서는 가에이 7년 1월 1일을 소급하여 안세이 원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대일본지진역보'(大日本地震史料) 및 '이과연표'(理科年表) 등 여러 지진 자료에서도 안세이 시기로 표시하고 있다.[16][17][18][19][20][21]
에도 막말의 대지진
1853년 7월 8일(가에이 6년 6월 3일) 페리 원정 사건이 일어났으며, 같은 해 8월 22일(음력 7월 18일)에는 러시아의 프리깃 디아나도 내항하면서 에도 막부는 잇다라 개항을 강요받았다. 디아나호를 끌고 온 예프피미 푸탸틴은 음력 11월 4일 안세이 도카이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인 음력 11월 1일 시모다의 후쿠센지(福泉寺)에서 막부에서 파견된 가와지 도시아키라에게 시모다항은 안전한 항구가 아니라며 다른 항구로 이동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22]
결국 안세이 도카이 지진으로 시모다항이 황폐화되었지만 이후 나가사키를 넘어서는 일본 외교 최전선이 되어 1856년 타운젠드 해리스 제독은 시모다에서 에도 막부와의 협상에 임했다. 해리스의 정부가 된 사이토우 기치가 준비금 25냥, 연봉 125냥으로 넘어가게 된 것도 도카이 지진으로 생가가 휩쓸려 사라져 빈궁하게 되었다는 배경이 있었다.[23]
안세이 대지진이 일어난 막말 시기에는 도막운동과 같이 사회적으로 혼란한 가운데 대지진도 연발하였다.[22][24][25] 아래는 안세이 시기 일어난 지진과 주요 사건 연표이다.
안세이 이전 |
안세이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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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이 이후 |
각주
참고 문헌
- 武者金吉, 편집. (1951). 《日本地震史料》. 毎日新聞社.
- 東京大学地震研究所『新収 日本地震史料 五巻 自弘化元年至明治五年』日本電気協会、1985年
- 東京大学地震研究所『新収 日本地震史料 五 別巻二-一/二 安政江戸地震』日本電気協会、1985年
- 東京大学地震研究所『新収 日本地震史料 五 別巻三 伊賀上野地震』日本電気協会、1986年
- 東京大学地震研究所『新収 日本地震史料 五 別巻四 飛越地震』日本電気協会、1986年
- 東京大学地震研究所『新収 日本地震史料 五 別巻五-一/二 安政東海・南海地震』日本電気協会、1987年
- 『安政見聞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