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포스카리

프란체스코 포스카리(이탈리아어: Francesco Foscari, (1373년 – 1457년 11월 1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작 시기인 1423년부터 1457년까지의 베네치아의 도제이다.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라차로 바스티아니작

생애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인 포스카리는 1423년[1]에 또다른 후보자인 피에트로 로레단을 물리치고 도제로 선출되기 이전에 대사, 10인 위원회, 재판관, 산마르코의 대리인[2], 40인의 대표등 여러 공직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해서 일했었다. 그의 도제로서의 업무는 이탈리아 북부를 모두 지배하려던 비스콘티 가문이 다스리던 밀라노를 상대로 길고 오래된 여러 전쟁에서 베네치아를 이끈 것이였다.[3] 테라페르마에서 베네치아의 혼란에 타당한 이유였음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 의원이자 역사가인 베르나르도 주스티니아니가 전해준 포스카리의 추도연설이 제안되었고,[4] 몇 번의 승리에도 해양에서 부와 힘이 원천이였던 베네치아는 밀라노와 전쟁은 크나큰 대가를 치렀다. 포스카리가 이끌던 시기에 동맹인 피렌체에게 버림받은 베네치아는 마침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이끌던 밀라노 군대에게 제압당하였다. 스포르차는 곧 베네치아를 남겨두고 피렌체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프란체스코 포스카리의 문장.

포스카리는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처음에는 마리아 프리울리(Maria Priuli) 그후에는 1415년 마리나 나니와 하였다.[5] 1445년에 그에게는 살아있는 자식이 자코포(Jacopo) 단 한 명만이 있었는데, 그는 뇌물수수와 부패로 10인 위원회에 고발당하여 추방당하였다. 1450년, 1456년에 두 번 이상의 재판 끝에 크레타에서 자코포의 투옥이 결정되었고 결국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자코포의 죽음 소식은 포스카리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1457년 10월에 10인 위원회는 그에게 사임하도록 강요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1주일 뒤에 베네치아 대중들의 격렬한 반응으로 인해 그에게 국가장이 치뤄졌다.

두 포스카리의 이별 (프란체스코 아이에츠작,1842년 (피렌체 모데나 미술관).

라차로 바스티아니가 그린 그의 초상화외에도, 포스카리는 도나텔로에게서 얇은 돋을 새긴 청동 명판을 주문을 했었는데, 그중 일부가 남아있다.[6] 그의 무릎 꿇고 산마르코에 기도하는 조상이 두칼레 궁전 정문에 위치해있었으나 1797년에 혁명 정부의 명령으로 들어선 후 해체되었으며, 머리 부분은 보존되어 두칼레 궁전 오페라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7] 그의 기념비는 조각가 안토니오 브레뇨와 그의 형제이자 건축가인 파올로 브레뇨의 합작으로, 베네치아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데이 프라리 교회에 헌납되었다.[8]

문학과 오페라에서

그의 무덤.

포스카리의 일생은 조지 고든 바이런의 《두 포스카리》라는 글과 새뮤얼 로저스의 장편화 《이탈리아》의 이야기 중 한 편의 주재였다. 바이런의 글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가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두 사람의 포스카리》에 사용할 리베르토로 각색되었고, 그 오페라는 1844년 11월 3일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같이 보기

참고

추가 참고 도서

  • Romano, Dennis (2007년). 《The Likeness of Venice: A Life of Doge Francesco Foscari》. 예일 대학출판부. ISBN 0-300-11202-5. 

외부 링크

전임
톰마소 모체니고
베네치아 도제
1423년 - 1457년
후임
파스콸레 말리피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