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조선의 첩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7월 26일 (음력 7월 8일[4]) ~ 1786년 10월 24일 (음력 9월 14일[5]))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후궁이며,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의빈 성씨
宜嬪 成氏
조선 정조의 후궁
이름
성덕임(成德任)[1]
별호 상의(尙儀) 미상 ~ 1782년
소용(昭容) 1782년 ~ 1783년
의빈(宜嬪) 1783년 ~ 1786년

의빈궁(宜嬪宮) (사당)[2]
안현궁(安峴宮) (사당 이칭)[3]
신상정보
출생일 1753년 7월 26일(1753-07-26) (양력)
사망일 1786년 10월 24일(1786-10-24)(33세) (양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가문 창녕 성씨
부친 성윤우
모친 부안 임씨
배우자 정조
자녀 1남 (1남 1녀)
문효세자, 옹주(조졸)
능묘 의빈창녕성씨지묘(宜嬪昌寧成氏之墓)
효창원 왼쪽 언덕 → 서삼릉 빈·귀인 묘역

개요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영조 때 입궁했고 청선공주, 청연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고전소설 《곽장양문록》을 국문 필사했다.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가 내린 승은을 두 번 거절하고 나서 후궁이 되었다. 정조와의 사이에서 문효세자옹주를 낳았다. 사후 의빈 성씨의 소망대로 효창원 왼쪽 산등성이에 묘소가 조성되었고 일본에 의해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기 전까지 어머니와 아들의 무덤이 백 걸음 떨어진 곳에 나란히 있었다.[주 1] 공식적으로 궁호를 받은 기록은 없으나, 정조 때 의빈궁(宜嬪宮)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고종칠궁(七宮)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순종 때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칠궁에서 폐지되었으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생애

초년기

출생 및 집안 배경

의빈 성씨(宜嬪 成氏)의 본관은 창녕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며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와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의 딸로 태어났다.[6]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의빈의 신분과 집안은 한미했다. 고조부 성경(成景)은 군자감 정(정3품)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증조부 성근립(成謹立)과 조부 성수산(成壽山)은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1787년(정조 11년) 이전에 성근립은 판결사(정3품), 성수산은 좌윤(종2품)에 증직 되었고 1787년(정조 11년)에 각각 이조참판(종2품), 이조판서(정2품)로 다시 추증되었다.[7]

아버지 성윤우[주 2]정조의 외조부가 되는 영풍부원군 홍봉한(洪鳳漢)[8], 승지 한준증(韓俊增)의 청지기로 지낸 적이 있고 미포아문의 고직으로 있기도 했다.[9] 1753년(영조 29년)에 교련관으로 무관직에 올라[10] 1754년(영조 30년)에 경복궁 가위장이 되었고[11] 1755년(영조 31년)에 절충장군(정3품)[12], 가선대부(종2품)를 거쳐[13] 1761년(영조 37년)에 첨절제사(종3품)가 되었다.[14]

성윤우는 장흥 마씨(長興 馬氏)와 초혼을 하고 부안 임씨(扶安 林氏)와 재혼하고 단양 지씨(丹陽 池氏)와 삼혼을 했다. 《창녕성씨세보》와 《창녕성씨상곡공파보》에 따르면 장흥 마씨는 1775년(영조 51년)에 사망했다.[15] 그러나 1769년(영조 45년)에 성윤우가 사망하자 장흥 마씨, 부안 임씨와 합장 되었고[16] 사망연도가 미상인 단양 지씨는 춘성군에 묘가 조성되었다. 따라서 장흥 마씨의 사망연도는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외조부 임종주(林宗胄)는 통례원 인의(종6품)였는데[17]1786년(정조 10년) 11월 이후에 통덕랑(정5품)으로 증직 되었다. 어머니 부안 임씨는 의빈 성씨가 4살이 되는 1756년(영조 32년)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8]

첫째 오빠 성담(成湛)은 무과에 합격했지만 1783년(정조 7년)에 무관직을 제수받기 전에 사망했고[19], 둘째 오빠 성협(成浹)은 절충장군(정3품)[20], 셋째 오빠 성완(成浣)은 부사용(종9품)[21], 막냇동생 성흡(成洽)은 만호(종4품)의 자리까지 올랐다.[22] 넷째 오빠 성숙(成淑)은 무과에 합격하지 못했다. 조카들 중에서는 성국민(成國民)은 현감(종6품)[23], 성도민(成道民)은 선략장군(종4품)[24], 성순민(成舜民)은 첨정(종4품)[25]이 되었다.

궁녀 입궁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따르면 아버지 성윤우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인연이 계기가 되어 1762년(영조 38년) 이후에 입궁했고[26] 혜경궁 홍씨가 친히 길렀다. 다른 원인으로는 성윤우가 전포아문 관리와 7천 냥을 범포해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혜경궁 홍씨가 의빈 성씨를 거두었다고 한다.[27]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같은 사건이 나오지 않는다. 성윤우는 1761년(영조 37년) 6월에 첨절제사가 되었고 다음 달에 하직했다.

궁녀 생활

첫 번째 승은 거절

1765년(영조 41년)에 정조는 여색을 가까이 했고[28] 그해 11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했다. 감기, 복통, 피부질환, 담증, 번열, 현기증, 식은땀 등의 증세를 겪고 1766년(영조 42년) 6월이 지나서야 쾌차했다.[29] 그해에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감히 명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죽음을 맹세하며 사양했다. 이에 정조는 의빈의 뜻을 받아들이고 종용하지 않았다.[30]

1769년(영조 45년)에는 평소에 담벽증을 앓고 있었던[31] 아버지 성윤우가 사망했다.[32]

《곽장양문록》 필사

1773년(영조 49년)에 청연공주, 청선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고전소설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을 국문 필사하였다. 이 소설은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 가운데 최고로 오래된 필사소설이며, 의빈이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표기되어 있다.[33]

후궁 생활

두 번째 승은 거절 후 승낙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의하면 1780년(정조 4년) 12월에 의빈 성씨로 추정되는 나인이 임신한 지 여러 달 되었고[34] 1781년(정조 5년) 7월에는 의빈 성씨가 임신 중이었다.[35] 반면에 정조의 《어제의빈묘지명》에서는 합궁한 달에 바로 문효세자를 임신했다.[36] 즉, 원빈 홍씨화빈 윤씨가 간택되고 나서 1781년(정조 5년)에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리자 의빈 성씨는 거듭 사양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였다.

후궁 봉작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37]

1782년(정조 6년) 8월 26일 전에 상의(정5품)가 되었고[38] 문효세자가 태어난 당일에 소용(정3품) 봉작을 받았다.[39] 12월에 작호(爵號)를 올리는 일을 도목정사(관리의 치적을 심사하여 면직하거나 승진 시킴)에서 거행했고[40] 1783년(정조 7년)에 의빈(정1품)으로 진봉했다. 정조는 좌의정 이복원(李福源)과 우의정 김익(金熤)에게 빈호를 의논해서 정하라고 했으나[41] 직접 '의(宜)'자로 정했다.

문효세자와 옹주 출생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42]

1782년(정조 6년) 8월 26일에 공조판서 서유경(徐有慶)을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43] 9월 7일에 호산청이 설치되었고 인시(새벽3시~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44] 연화당은 선정전 동쪽에 있고[45] 청기와 등을 사용한 인경궁의 전각들을 옮겨놓은 건물 중 하나여서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46] 이날 혜경궁은 본가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호산청으로 보내서 해산을 돕게 했다.[47] 정조는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많고 많은 일 중에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라고 심경을 밝혔다.[48] 호산청 의관 강명길(康命吉), 변관해(卞觀海), 탕약서원 신정희(申正希), 범경문(范慶文), 의녀 설매(雪梅), 일애(日愛)에게 벼슬을 임명했고[49] 9월 13일에 호산청을 철수했다.[50]

내가 이르기를,

“조금 전에 순산(順産)하여 딸을 얻었다. 아들이 있는 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
하니, 김사목이 아뢰기를,
“신들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사스럽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51]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 묘시(새벽 5시~아침 7시)에는 옹주를 낳았다. 잠깐 사이에 의빈이 옹주를 낳은 까닭에 호산청은 옹주가 태어나고 나서 설치했다.

문효세자 책봉

문효세자는 태어난 지 100일이 안 된 1782년(정조 6년) 11월에 원자로 책봉 되었다.[52] 1784년(정조 8년) 7월에는 왕세자로 책봉 되었고[53] 8월에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창덕궁 중희당[54]에서 왕세자 책봉 예식을 거행했다.[55]

자녀 요절

옹주는 1784년(정조 8년) 5월에 궁궐 밖으로 피우(避寓) 했는데 5월 12일 신시(오후 3~5시)에 경기(驚氣)로 갑자기 사망했다.[56] 이날 정조가 “나는 잊겠다.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없겠는가. 다만 자궁(慈宮, 혜경궁)께 슬픔을 끼친 것이 매우 걱정스럽다."라고 말한 것을 볼 때 혜경궁 홍씨가 손녀의 죽음을 무척 슬퍼한 것으로 보인다.[57] 정조는 옹주를 잃은 슬픔으로 5월 13일에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58] 옹주의 장례는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무관 임율(任嵂)이 주관했다.[59]

문효세자는 1786년(정조 10년) 5월 3일에 홍역을 앓아서 의약청을 설치했다.[60] 증상이 호전되어서 5월 6일에 의약청을 철수하고[61] 정조는 고유제, 사면령, 과거 실시, 조세 탕감을 지시하고 의약청에 상을 내렸다.[62] 그러나 5월 10일부터 증세가 심해졌고 다음 날인 5월 11일 미시(오후 1~3시)에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에서 사망했다.[63]

5년 동안 외척이었던 본가

의빈 성씨의 본가 창녕 성씨는 한때 외척이었지만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없고 의빈과 문효세자가 1786년(정조 10년)에 사망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버지 성윤우(成胤祐)는 1769년(영조 45년), 첫째 오빠 성담(成湛)은 1783년(정조 7년)에 사망했다. 넷째 오빠 성숙(成淑)은 정조의 《어제의빈묘지명》에서 의빈 성씨에게 오빠가 두 명 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일찍이 사망했다. 백부 성윤조(成胤祚)는 1728년(영조 4년)에 훈련주부(종6품)로 임명된 이후 공식적인 기록이 없고 숙부 성연지(成淵祉), 사촌 성호(成灝), 성연(成淵) 또한 뚜렷한 행적을 찾을 수 없다.

1782년(정조 6년)에 문효세자가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셋째 오빠 성식(成湜)은 정조로부터 "지금으로서는 외인(外人)과 내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어영청 군교 직위에서 파면당하고[64] 호조서리가 되었다.[65] 외척이 된 성식을 왕을 호위하는 군영인 어영청에 두는 대신, 호조에 두는 것이 알맞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1789년(정조 13년)에 부사용(종9품)이 되었고 그해 11월 이후에 성완(成浣)으로 개명했다.[66]

1784년(정조 8년)에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둘째 오빠 성협(成浹)과 성식(成湜)은 동궁의 내례(승정원, 액정서에 속한 하인)가 되었다.[67] 성협은 훗날 절충장군(정3품)이 되었다. 같은 해에 막냇동생 성흡(成洽)이 무과에 합격했다.[68] 1798년(정조 22년)에 교련관이 되었고[69] 1801년(순조 1년)에는 만호(종4품)의 자리에 올랐다.[70]

고모 창녕 성씨는 공조판서 정방(鄭枋)의 첩, 언니 창녕 성씨홍낙성(洪樂性)의 첩이어서 의빈 성씨와 정방, 홍낙성은 인척 관계였다. 정방은 1784년(정조 8년)부터 부총관, 한성 좌윤, 참판, 판의금부사 등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직위를 거쳐 1786년(정조 10년)에 공조판서(정2품)가 되었다.[71] 정방의 조카 정복환(鄭福煥)은 1786년(정조 10년)에 부안 현감(종6품)이 되었고[72] 1787년(정조 11년)에 홍문관 교리(정5품)가 되었다.[73] 당대 사람들은 정방과 정복환이 의빈과 인척 관계여서 각각 공조판서와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고 웃었다.[74] 홍낙성은 영조부터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각별한 신임을 받았고 1783년(정조 7년)에 좌의정(정1품)이 되었다.[주 3]

1786년(정조 10년)에 의빈의 조카 윤동철(尹東喆)이 의빈묘전감(宜嬪墓典監)에 선발되었다. 1799년(정조 23년)부터는 윤동철의 아버지 윤광은(尹光殷)이 직임을 맡았다.[75] 그런데 1806년(순조 6년)에 묘소의 남쪽 길가에 줄지어 심어 둔 큰 버드나무 10그루를 함부로 찍어 내다 팔아버렸다. 윤광은은 처벌받았고 1807년(순조 7년)에 사망했다.[76] 1808년(순조 8년)에는 윤동철의 아들 윤인석(尹仁錫)이 의빈 성씨의 친속인데 아직 은택을 입지 못하고 있다며 격쟁 원정(擊錚原情, 일반 백성이 호소하는 문서를 직접 국왕에게 제출)을 냈다. 순조는 원정(原情)을 시행하지 않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주 4]

1874년(고종 11년)에는 무과 천거제에서 삭제되었던 의빈의 본가가 숙빈 최씨, 영빈 이씨의 본가와 함께 복구되었다.[77] 무과에 합격한 성윤우의 5대손 성원진(成元鎭), 성영준(成永俊), 6대손 성낙소(成樂韶), 성낙호(成樂頀)은 음관으로 벼슬이 더 올랐다.

본가 증직

1784년(정조 8년)에 형조 판서 조시준(趙時俊)[78],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문효세자 사친의 본가를 증직해야 된다고 했으나 《속대전》에 왕세자의 사친 3대를 추증한 사례가 없어서 보류되었다. 1785년(정조 9년)에 좌의정 홍낙성이 다시 추진하자 정조는 왕세자 사친의 부친을 추증하는 것이 근거할 만한 문적은 있지만 알 수 없는 점이 많고, 선조가 내렸던 하교는 일시적이었을 것이라며 보류했다.[79] 이외에도 홍봉한의 경우는 어디에 추증해야 하는지, 문효세자는 효의왕후의 아들로 삼았으니 세자 사친의 부친에 대한 추증은 중요한 관계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매번 허락하지 않았다.[80] 12월에 홍낙성이 또 아뢰자 정조는 급한 것이 아니니 내년 봄을 기다려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재차 미루었다.[81] 1786년(정조 10년)에 문효세자가 사망하고 나서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 왕세자의 사친 본가를 증직하는 것은 법전에 나와 있고, 곧 《선원보략》을 수정하니 문효세자의 사친 본가를 추증해야 된다고 하자 그제야 정조가 승낙했다.[82] 이후 증조부 성근립은 이조참판(종2품), 증조모 충주 유씨는 정부인, 조부 성수산은 이조판서(정2품), 증조모 김해 김씨, 창원 황씨는 정부인에 증직 되었다. 아버지 성윤우는 좌찬성(종1품), 어머니 부안 임씨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다만 의빈의 전어머니 장흥 마씨와 새어머니 단양 지씨가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화빈 윤씨와의 관계

화빈 윤씨정조가 1780년(정조 4년)에 후궁 간택을 주저하는 시기[83]에 삼간택을 거쳐 자경전(慈慶殿)에서 가례를 올리고 입궁했다. 1780년(정조 4년)에 임신을 해서 1781년(정조 5년)에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끝내 아무 소식이 없었다.[84] 1782년(정조 6년)에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자 화빈 윤씨의 인척 서명선(徐命善)은 정조에게 문효세자의 원자 정호를 주청했다. 1784년(정조 8년)에 의빈 성씨가 옹주를 낳고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화빈의 입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의빈 성씨는 왕세자의 생모지만 정1품 빈이라서 무품 빈인 화빈 윤씨보다 우위에 설 수 없었다.

그런데 문효세자가 태어나고 원자로 책봉된 후에도 화빈의 산실청은 유지되고 있었다. 대사간 신응현(申應顯)이 이에 대해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니 신하들은 기뻐하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만 있어야 하는데 어린 원자를 농락하고 알 수 없는 말을 하여 조정을 의혹 시킨다.”는 이유로 벼슬 명부에서 삭제했다.[85] 이후 1787년(정조 11년)에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산실청이 30개월 동안 유지되었다는 영의정 김치인의 말을 근거로 보면 화빈의 산실청은 1781년(정조 5년) 1월부터 1783년(정조 7년) 7월까지 존속되었다. 정조는 1782년(정조 6년) 때와는 다르게 신하들의 주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화빈의 고모부 조시위(趙時偉)는 1780년(정조 4년) 이후로 임금의 외척을 자칭하면서 조정 일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고, 문효세자의 출생 때는 "호칭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라는 발언[86], 화빈의 산실청 문제 등으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87]

그 외 당시에 의빈 성씨가 방중술을 써서 문효세자를 낳았다[88], 화빈 윤씨는 목이 쉬도록 울면서 의빈을 원망하고 효의왕후를 시기한 죄로 가두고 궁호(宮號)를 강등할지 의논했다는 소문이 돌아다녔다.[89] 1786년(정조 10년)에는 자현(子懸, 임신 중에 태기가 고르지 못하고 위로 치밀어 답답하고 숨이 차는 증상)을 앓는 의빈이 화빈에게 독살 당했고 화빈은 그 죄로 내쳐졌다는 소문마저 퍼졌다.[90]

이를 토대로 의빈 성씨와 화빈 윤씨는 서로 우호적인 관계가 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사망

의빈은 마음이 약해서 칠정(七情, 마음의 병) 증세가 있는데 문효세자 사망 이후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돌아왔다.[91] 정조는 매일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는 항상 검열했으며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 안에 보관하고 쓰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786년 9월 14일 미시(오후 1시~3시)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92]의 몸으로 사망했다.

사인 추정

《어제의빈묘지명》과 《이재난고》에 기록된 의빈의 증세는 대부분 임신중독증의 증상(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음, 정신 혼미, 사지가 뻣뻣해짐, 명치 부위의 통증 등)과 일치한다. 임신중독증의 원인 중 하나가 노산인데 의빈 성씨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4세에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임신중독증은 치명적인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는데, 의빈 성씨 역시 결국 졸서했다.

독살설

1786년(정조 10년) 11월 20일에 상계군(常溪君)이 의문사 하고[93] 12월 1일에 정순왕후는 의빈과 문효세자는 온갖 증세가 처음부터 괴이 했는데 이는 은언군이 아들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독살 했다고 주장하며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식음을 전폐하겠다는 언문 교지를 내렸다.[94] 이후 구선복(具善復)이 상계군(常溪君)을 추대 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95] 구선복은 능지처사 되고[96] 은언군(恩彦君)은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97] 12월 27일에 손용득(孫龍得)은 내관 이윤묵(李允默)이 의빈을 독살했다는 의혹스러운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다. 정조는 의빈의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반드시 직접 검열했기 때문에 근거 없는 말이라고 했다. 이에 손용득은 유배형을 받았고[98] 이윤묵은 당시 이미 유배 중이었다.[99] 또한 민간에서는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는 소문도 있었다.[100]

사후

예장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101]

정조김치인(金致仁), 김상철(金尙喆), 서명선(徐命善), 홍낙성(洪樂性) 등이 있는 자리에서 "의빈의 죽음이 참으로 몹시 슬프고, 잘 자고 잘 먹어도 마음은 놀랄만한 변화가 없어서 걱정된다."라고 심경을 밝혔다.[102] 정조는 의빈의 상례(喪禮)를 영빈 이씨의 전례대로 후궁 1등의 예로 거행하라고 했지만, 그 해에 흉년이 들었고 문효세자를 예장할 때와 칙명을 전달하는 사신의 행차 때 많은 돈을 써서 나랏돈에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호조 재력마저 탕진되어서 도감(都監)을 세우지 못하고[103] 모든 비용을 절감하여 호조와 전의감에 특별히 따로 설치하여 예장을 거행하되 절차는 영빈 이씨의 규례를 따랐다.[104][105] 9월 16일 묘시(오전 5시~7시)에 의빈을 입관하고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 빈소를 마련했다.[106][107] 11월에 궁(宮)과 묘(墓)의 제향이 정해지고[108] 11월 20일에 효창원(孝昌園) 왼쪽 언덕 임좌(壬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109] 예장 때 박명원(朴明源), 서유녕(徐有寧), 서용보(徐龍輔), 김사목(金思穆), 서유방(徐有防) 등 정조의 신임을 받는 신하들이 대거 참여했고 이복원(李福源), 조경(趙璥), 김종수(金鍾秀), 김재찬(金載瓚) 등이 만사(挽詞)를 지었다.

묘소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와 사적으로는 모자지간이나, 종법으로는 문효세자효의왕후의 양자여서 사친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의 바람대로 1786년(정조 10년) 9월에 의빈의 묘산(墓山)을 효창묘 왼쪽 산등성이로 정했고, 11월에 효창묘(孝昌墓)와 백 걸음 떨어진 곳[110]에 의빈묘(宜嬪墓)를 조성했다.[111] 이후 효창원과 의빈묘 소속이 소란을 피우는 문제가 생기자 정조는 "달리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이후로는 경계를 나누지 말고 효창묘의 소속으로 하여금 의빈묘를 겸관하게 하라."라고 했다.[112] 숙종숙빈 최씨의 묫자리를 명선공주명혜공주의 묘 근처로 정한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를 파직 시키고 다시 정하라고 했던 일과 비교하면 이례적이었다.[113] 본래 효창원(孝昌園)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로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했고 의빈묘(宜嬪墓)는 곡장이 삼면으로 둘러져 있고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쌍, 문인석 한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정조는 1787년(정조 11년)부터 1790년(정조 14년) 5월까지 의빈의 무덤 및 사당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하지만 1790년(정조 14년) 7월에 순조가 태어난 이후로는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다. 문효세자의 무덤과 사당도 마찬가지였는데 순조의 후계 정통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829년(순조 29년)에 효창묘에서 동쪽으로 99보 떨어진 곳에 영온옹주의 묘가 마련되었고[114], 1854년(철종 5년)에 영온옹주의 생모 숙의 박씨의 묘가 효창묘 내에 조성되었다. 1870년(고종 7년)에는 효창묘가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되었다.[115]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숙의 박씨의 묘가 서삼릉 후궁묘역으로 이장되고 1939년에 영온옹주의 묘가 서삼릉 왕자·왕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뒤이어 1940년에 의빈묘(宜嬪墓)는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1944년에 효창원(孝昌園)은 의령원(懿寧園) 앞으로 이장되었다.[116]

사당

의빈묘(宜嬪廟)

1786년(정조 10년)에 창덕궁과 가까운 한성부 북부 안국방(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사당 의빈묘(宜嬪廟)가 세워졌다. 정조는 인정을 헤아려 사도세자(장조)의 사당 경모궁(景慕宮) 남쪽 담장 밖에 있는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文禧廟)를 의빈묘 서쪽 담장 밖으로 옮겼고, 1789년(정조 13년)에 모자의 사당이 한 곳에 있게 되었다. 1870년(고종 7년)에 대수가 다 되어 문희묘는 정조의 동복형 의소세손의 사당 의소묘(懿昭廟)로 이봉 되었다.[117]

의빈궁(宜嬪宮)

1786년(정조 10년)에 의빈 성씨의 궁(宮)과 묘(墓)의 제향은 영빈 이씨의 전례를 따랐다.[118] 다만 정조가 공식적으로 의빈에게 궁호를 내린 기록은 없으나 1787년(정조 11년)에 정조가 의빈궁(宜嬪宮)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 또한 당시 유우량(劉佑良)은 의빈궁의 청지기였으니[119] 1787년(정조 11년)부터 의빈의 제궁(祭宮)은 의빈궁(宜嬪宮)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의빈에 대한 궁(宮)의 확립된 호칭이 없어서인지 의빈방(宜嬪房), 의빈묘(宜嬪廟), 의빈궁(宜嬪宮)을 혼용했다. 1790년(정조 14년)에 간행한 《문희묘영건청등록》의 <정당이하제처 도설(正堂以下諸處 圖說)>에는 의빈의 사당을 의빈묘(宜嬪廟)로 기록했고 간혹 의빈궁(宜嬪宮)이라고 지칭했다.[120]

의빈궁(宜嬪宮)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문서는 1797년(정조 21년) 이후에 완성한 《제물등록》이다. 의빈궁은 명일(명절, 국경일 총칭)에 육상궁(숙빈 최씨), 선희궁(영빈 이씨)와 작헌례(사당·능원에 술잔을 올리는 예식)를 같은 예법으로 지냈다. 숙빈 최씨영조의 사친이고 영빈 이씨정조의 생부가 되는 사도세자의 사친이나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생모였다. 당시에는 유빈 박씨가 낳은 순조가 원자(元子)로 있어서 의빈은 후사 없이 사망한 후궁일 뿐인데 삼궁(三宮)에 속해서 제사를 지낸 일은 이례적이었다.[121] 1799년(정조 23년)에 편찬한《사전사례편고》에는 의빈궁묘가 덕흥궁묘(덕흥대원군), 대빈궁묘(희빈 장씨), 선희궁묘(영빈 이씨)와 사궁(私宮)에 속해 있다고 기록했다. 1816년(고종 6년)의 《평안도내각읍소재각궁방각사전답급이생환기사결성책(平安道內各邑所在各宮房各司田畓及泥生環起査結成冊)》, 1865년(고종 2년)에 편찬한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 《대전회통》과 1867년(고종 4년)에 완성한 《육전조례》등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1787년(정조 10년)에 의빈(宜嬪)이라는 호칭 자체로 사당을 의빈궁(宜嬪宮)으로 정하고 1797년(정조 21년) 이후에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조 이후에도 의빈궁(宜嬪宮), 의빈묘(宜嬪廟), 의빈방(宜嬪房)이라는 명칭을 두루 사용했다. 비슷한 예로 희빈 장씨(옥산부대빈)은 대빈(大嬪)이라는 호칭 자체로 사당을 대빈궁(大嬪宮)으로 정했는데 희빈궁(禧嬪宮), 희빈묘(禧嬪廟), 대빈방(大嬪房)이라고 하기도 했다.[122]

안현궁(安峴宮)

1786년(정조 10년)에 의빈의 빈소를 안현의 본궁에 차려서 안현궁(安峴宮)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예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곳이 한성부 남부 회현방 송현에 있어서 송현궁(松峴宮)이라고 했다.[123] 1793년(정조 17년) 황해도 은율현에 있는 안현궁의 궁방[124], 1807년(순조 7년)에 정순왕후의 국장 과정을 담은 《효안전일기》[125], 1832년(순조 32년)에 안현궁의 하인에 대한 일[126], 1879년(고종 16년)에 쓴 《지각관청일기》[127], 1894년(고종 31년)에 간행한 《의판》[128], 1904년(광무 8년)에 수정한 순조의 국장 과정을 담은 《효성전일기》[129] 등에서 안현궁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안현궁은 의빈궁의 이칭 격이나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칠궁(七宮)

제향

1870년(고종 7년)에 제사를 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 되어서 의빈 성씨의 신주는 희빈 장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의 신주와 함께 육상궁(숙빈 최씨)의 별묘에 봉안했다. 의빈의 사당과 한 영역에 있던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는 백부 의소세손의 사당인 의소묘(懿昭廟)에 합쳐서 봉안했다. 1873년(고종 10년)에 저경궁(인빈 김씨), 대빈궁(희빈 장씨), 육상궁(숙빈 최씨), 연호궁(정빈 이씨), 경우궁(유빈 박씨), 선희궁(영빈 이씨), 의빈궁(의빈 성씨)을 '궁(宮)'으로 명칭했다.[130] 1898년(광무 2년)에는 이 궁(宮)을 칠궁(七宮)으로 확립했다.[131]

폐궁

〈개정한 제사 제도〔享祀釐正〕〉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에 봉안한 신위는 육상궁 안에 각별히 신주의 방을 만들어 합사하고, 폐궁(廢宮)의 경우 연호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신위를 이안하는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 의빈궁(宜嬪宮), 경수궁(慶壽宮), 영소묘(永昭廟), 문희묘(文禧廟)에 봉안한 신위는 매안(埋安)하고 해당 궁과 사당은 의빈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다만 의빈궁과 경수궁의 묘소에는 영소묘와 문희묘의 원소(園所) 예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고, 매안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132]

1908년(융희 2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서 국왕의 사친을 봉안한 사당이 아닌 의빈궁은 칠궁에서 폐궁되었고 신주는 무덤 앞에 묻혔다. 다만 의빈궁이라는 명칭은 유지되었고[133] 1년에 한 번씩 효창원(문효세자)과 의령원(의소세자)의 예를 따라서 제사를 지냈다.

정조 어제문(正祖 御製文)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

의빈 성씨가 사망하자 정조는 묘표(墓表)와 묘지명(墓誌銘)을 손수 지었다. 전면대자(前面大字)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음기(陰記, 비석 뒷면에 새긴 글)는 서용보(徐龍輔)가 썼다. 비석은 1786년(정조 10년) 11월에 세워졌다.[134]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년, 정조 10년)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흘러 갑신(1786년 9월 14일)에 빈 또한 세상을 떠났다. 석 달이 지나서 경인(1786년 11월 20일)에 고양군 율목동에 있는 문효세자의 묘 왼쪽 산등성이 임좌지원에 장사 지냈다. 빈은 문효를 잃고 나서 항상 죽기를 바라더니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어 이제 효창묘 곁에 묻혔으니,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하겠는가? 오호, 슬프도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겨우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성명과 자를 능히 구별했다. 용모는 단정하고 성품은 곧고 깨끗하고 단정하며, 인지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열 살(영조 38년, 1762년)이 넘어서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갔는데 척리가(임금의 내척·외척)의 부인들이 벌열(나라에 공로와 벼슬 경력이 많음)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훌륭하고 뛰어나게 달라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알고 검소하고 절약했다. 심지어 도회지(인구가 많고 번화한 지역)에서의 의리를 명백히 구별하고 조금도 변치 않고 굳게 지켰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하여 감히 받아들이기 매우 황송하다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감동하고 더는 가까이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나서 다시 승은을 내리자 빈은 또 고사했다. 이에 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린 뒤에야 비로소 명을 따랐고 당석(자기 차례가 돌아온 날 밤에 잠자리에서 모심) 한 달에 임신을 하여 임인(1782년, 정조 6년) 9월에 왕세자가 태어났다. 이 해에 소용(정 3품)이 되었고 금세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는데 왕위를 이을 왕세자로 인해서였다. 이로부터 더욱 스스로를 낮추고 정성스럽게 예를 갖추고 내전을 섬겼다. 시침(임금을 모시고 잠)을 할 때에는 말하기를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으나 위에 내전이 있고 또 빈어(화빈 윤씨)가 있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또 감히 매 때마다 당석이 잘못되었다고 간절히 사양하며 피했다.

내전(효의왕후)은 문효세자를 아들로 받아들였는데 가령 양육하는 데 있어서는 생모가 필히 임하는 것이 국조에서 전해오는 정례였다. 빈은 사려 하며 감히 마음대로 결정하거나 처리하지 않고 오직 내전의 말을 따랐고, 내전은 빈으로 하여금 스스로 기르게 하여 조금 더 장성하기를 기다렸다. 빈이 문효세자를 보살필 때는 오직 조심스럽게 하여 5년 동안 한결같이 밤이 오면 새벽을 밝힐 때까지 불을 끄지 않았고 잘 때는 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 나날이 몸소 비천한 일을 하고 문효세자에게는 극진히 말하고 존중히 여기며 공경했다. 누군가가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 말하기를 "저군(왕세자)이고 내전(효의왕후)의 아들입니다. 어찌 감히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 하였다.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릴 만하고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검소했다. 빈은 "제가 오늘날 지체가 높고 귀한 것은 분수에 넘치는데 더욱 스스로를 자랑하고 제멋대로 군다면 어찌 제 몸에 재앙이 들지 않을 것이며, 동궁(문효세자)을 위해 복을 아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1786년, 정조 10년) 5월의 변고(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사망)가 일어난 때에 능히 이치로 하여금 마음을 추스르고 말과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괴이하게 여겨 어찌 개의치 아니하냐고 물어보니 "몸은 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보는 나라는 위태함이 위엄이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다행히 제가 임신을 했지만 만약 제가 삼가지 않고 방자하게 마음대로 슬퍼한다면 마땅히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였거늘, 어찌 그리 병에 걸렸단 말인가? 병의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다스릴 수 없었다.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았고 날마다 목욕을 하였는데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살폈다.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으나 나를 대할 때는 기운을 내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메아리처럼 응답을 하였다. 임종하기 전날 저녁에 내가 몸소 방문하자 갑자기 처량해지더니 말보다 눈물이 앞섰다. 내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평소에 근심하는 태도로 나를 보지 않았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빈이 말하기를 "내전(효의왕후)께 아들을 낳는 경사가 있기를 살아있는 내내 기원해왔습니다. 종사를 위해서 천신이 다시 임신한 것은 다행이지만 제 마음은 견디지 못할 만큼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때에 복이 분수에 넘쳐서 병이 들고 심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다만 오래도록 지녀온 소원을 아직 이루지 못하였는데 죽을 고비에 임하자 애달픕니다. 바라건대 정전에 나아가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한다면 장차 경사가 찾아올 것이니, 죽어서도 즐겁고 좋아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힐책하려다 감동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거짓됨이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건대 어찌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죽음을 잊지 아니하고 맛보는 일과 언행을 조심했는데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성껏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매우 친밀하여 자매를 잃은 마음이었다. 온 궁 안 사람이 모두 빈의 죽음을 한탄하여 한숨 쉬고 슬퍼하며 애처로워했고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빈이 작위를 받고 나서 나는 더욱 엄하게 단단히 단속해서 이따금 사람이 견디지 못 할 때가 있었는데, 빈은 그러한 일에 처하면 하나의 뜻으로 기쁘고 좋게 받들고 따랐다. 일이 혹 더욱 은혜에 해당하면 두려움으로 움츠러들어서 멀리하고 견지 했으니 자못 겸손했다. 빈의 선산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의논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언하기를 "천한 집안일에 번잡하게 관청 비용을 쓰는 것은 참으로 사사로운 의견이 아닌지라 더욱이 감히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해서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니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에 드는 비용에 보태라."라고 일렀다. 동궁(문효세자)의 외가 사친은 증 찬성(정 1품)에 추증하지만 나는 전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교지를 내렸는데 빈은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기 집안사람에게 지나치다고 청하였다. 빈은 분황(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행하는 의식)의 예를 말리면서 이르기를 "증직은 나라의 법전에 기재되어 있어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으나 또 어찌 감히 장대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처럼 나는 빈을 매양 애석하게 여겨 따뜻한 밥과 모시를 은수(임금이 공이 높은 사람에게 베푸는 특별한 혜택) 했는데 도리어 궁의 후궁만도 못하였다. 비록 자기 자신을 굽히고 의지를 꺾어 검소함을 따랐으나 오히려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며 궁중 사람에게 늘 너그러이 빌려줬다. 결국에 가서는 세상을 떠나자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왔고, 생전에 은 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염습 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림)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궁인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하기를 "참으로 알겠도다. 빈이 검약을 지킨 진정한 청빈함이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다.

빈에게는 오리버니가 두 명 있는데 곤궁하여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였으나 사사로이 주는 일이 없었다. 내가 말하기를 "조정의 관작은 진실로 부당하고 법에 지나치게 벗어나서 남발하는데 너만 유독 남는 녹봉으로 배고픔과 추위를 돕지 않는구나." 하였다. 빈이 걱정하는 모양으로 대답하기를 "궁방이 세워진 이후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사가의 천한 사람에게 재물의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빈의 장례 때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옷과 신발을 빌렸다. 후궁 사친은 관직명이 없으면 궁중 출입이 허락되지 않으나, 빈에게는 오래전부터 본궁에서 접견하도록 했었다. 빈이 본궁으로 나가 살면서 사친과 여러 해 동안 격조하고 방문하지 못하게 하였다. 빈은 "올 때 임금에게 여쭈고 아뢰어 뜻을 받들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불러내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릇 형제가 몹시 가난하여 어찌할 수가 없어서 가족 간에 서로 비호하고 덮어주기를 바라면 빈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려고 했다. 단란함은 이 사람의 상정이거늘 어찌하여 다른 사람과 홀로 다르단 말인가. 내가 명을 내리면 단 한 가지 일도 멋대로 하지 않고 조심히 정성껏 지켰는데 이는 실지로 사실을 경험하였다.

궁궐에서 지낸 지 20여년인데 여태까지 눈을 부릅뜨고 다른 사람을 보는 일이 없었다. 일이 혹 어려워서 말다툼을 일으키는 실마리에 놓이면 의심스럽게 접근하여 반드시 자세한 사정을 알아내서 스스로 타당함에 이르렀다. 나는 보통 때 바깥 말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고 빈 역시 집안일을 바깥으로 갖고 나가지 않았으며 서로 말없이 술잔을 주고받았다. 내가 혹 가서 머무르면 부리는 궁중의 여종은 감히 할 수가 없어서 모두 두려워하며 숨었으나 빈은 그전에 자신을 삼가고 엄격하게 아랫사람들을 통솔하고 부지런히 가르쳤다. 또한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 솜씨가 훌륭하고 여가에는 글을 하였는데 문장 역시 범상치 않았다. 수리 학문을 배우면 자세히 알고 연구하여 깨달아 식견이 더욱 지혜가 열려 도를 깨우쳤다. 이르는 곳마다 분명하니 비단 재능과 기예를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 빈의 장사 때 내가 반드시 비명(碑銘)을 짓는데 어찌 빈의 재주와 용모를 잊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궁중의 하인을 부리는 데 있어서 혹독하고 가혹하며 급사(給事)가 내 명을 받드는 데 있어서 마음에 들 때가 적었다. 빈을 후궁 반열에 둔지 20년이 되는데 훈칙을 명심하고 한 치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응대를 할 때는 신중하고 법도를 저절로 지켰으며 밤낮으로 부지런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이는 뛰어난 현인도 참으로 행하기 어렵도다. 본분을 삼가 지키고 신분의 엄격함을 명확하게 하였고, 청탁을 경계하고 통렬하게 끊었다.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킬 때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드는 것처럼 조심하고 경계하였는데 이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이제 의리와 관계된 것이 크게 옳고 그름이 분명하나 감히 말할 수 없고 일의 형세를 처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면 오랫동안 정성을 쌓았다. 있는 힘을 다해 물러서지 않고 곧바로 나아가서 하고 있는 의리로 하여금 마침내 극히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는 책을 읽은 사대부가 쉽게 갖추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일에 능하고 절개와 지조가 있다고 하여 널리 전해지고 당대의 미담이 될 것이다.

후일 빈의 상론(고인의 언행 및 인격을 평가)은 이와 같다. 빈의 출신은 한미하고 가난하여 스승으로부터 배움을 말미하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으나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거듭하여 내전(효의왕후)을 위해 몹시 마음을 쓰고 우러난 정성은 귀신도 가히 감동할 만하고 쇠와 돌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몸의 존귀는 일찍이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만으로 즐거워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매우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고 반드시 스스로 정성을 다하여 내전을 따르니 마침내 죽음에 임해서는 서글프게 울면서 평생 따르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으로서 간언하는 충성심이나 배에 칼을 꽂는 정성도 이보다 심할 순 없을 것이다. 덕성을 가진 마음가짐은 온전히 본연의 성품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마땅히 어진 아들을 낳아 영광된 왕세자를 이어받는 공을 세워서 나라 형세가 태산 반석과 같음을 우러르게 되었으니 경사를 길러 왕족이 번창해야 하나 국운이 불행하고 하늘의 뜻이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에 상변을 당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관계인지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저승으로 돌아가니 빈의 행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형상과 자취가 아주 없어질 것이다. 뛰어나게 우뚝한 말과 행실을 내가 기록하지 않는다면 누가 전하겠는가. 아주 없어질 것이 명백하니 애석하다. 이는 빈에게 한이 될 뿐만 아니라 문효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마침내 대략 찬차(시문 따위를 가려 뽑아서 차례를 정함) 했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도다.

그대 빈은 계유년(1753년, 영조 29년) 생이고 득년 34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빈의 본관은 창녕이고 비조는 고려의 중윤 인보(仁輔)다. 인보의 아들 송국(松國)은 문하시중이고 증손 여완(汝完)은 우리 왕조(조선)에서 검교정승 문정공이다. 여완의 첫째 아들은 석린(石璘), 둘째 아들은 석용(石瑢)이다. 셋째 아들 석인(石因)은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냈고 시호는 정평인데 즉 빈의 선조다. 그러나 명성이 중도에 쇠진한 동안 보계(譜系)를 잃었다. 7대조 만종(萬種)은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묘) 참봉이고 고조부 경(景)은 군자감 정이다. 아버지 증 찬성 윤우이고 어머니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는 통례원(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관장한 관서) 인의 종주(宗胄)의 딸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하늘을 따라 정중히 행동하고 말로서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돈독한 행실에 입은 지극히 옳은 말을 했으나 복록과 덕을 받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운명인가보다. 저 고요한 율천은 문효가 잠든 곳이니 서로 영원히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오랜 세월동안 배회하고 탄식할 것이다.

수록대부 금성위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 박명원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전면을 삼가 쓰다.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 규장각 검교 직각 지제의 신 서용보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음기(비석 뒷면에 새긴 글)를 삼가 쓰다.

숭정기원 후 세 번째 돌아온 병오(1786년, 정조 10년) 11월 모 일에 세우다.

어제의빈묘표(御製宜嬪墓表)

내가 즉위한 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에 의빈 성씨가 세상을 떠났고 이해 5월에는 문효세자를 잃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때가 가까워졌는데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 저녁에 옷깃을 여미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고하기를 "국가의 종사지망(아들을 많이 낳고 싶은 소망)이 정전이 아니라 천신으로 하여금 있는데, 천신이 병에 걸려 위독해진 것은 이 어울리지 않는 재앙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 자주 정전에 나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곧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개 내전(효의왕후)이 지금까지 아들을 낳고 기르지 못한 것을 평상시에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처음 승은을 내리자 간절히 사양하고 감히 시침을 들 수 없다고 하기에 틈을 타서 풍자를 해도 한결같게 매우 간절했었다. 목숨이 실가닥처럼 위태로운 사이에도 다시 기운을 내고 힘을 다하여 완연히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니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여 나도 모르게 얼굴빛을 고치고 허락했다. 내가 보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첩은 부귀영화를 누리면 언제나 정실이 자기를 싫어하고 핍박한다고 하여 정실을 업신여기고 본분을 무시했다. 죽을 고비에 이르면 걱정이 되어 부탁을 하지 않는 일이 드물고 자기 식솔을 부탁하는데 연연하거늘 빈은 죽은 후에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를 높여 영화로워지지 않았고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한결같이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내전만을 알고 반드시 그 소원을 이룰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어짊이 어찌 쉽겠는가.

문효세자는 빈의 소생이다. 빈은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 하여 더욱 겸손하고 양보하는 자세를 갖추었고 거처하는 곳은 수리하지 않았으며,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검약했다. 말하기를 "내가 오늘이 있는 것은 내가 감히 바라지 않았으니, 이는 전보다 더욱 조금이라도 크고 사치하게 벌리려 하고자 한다면 내 몸에 재앙이 올 것이니 이는 논할 겨를이 없다." 하였다. 이 어찌 동궁을 위해 복을 아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엄격하게 단속하여 은총을 내린 적이 없었다. 때때로 감당할 수 없었을 터인데 전혀 내색하지 않고 칙령을 조심스럽게 지키고 경계를 조심하면서 벌벌 떨었으며 시종일관 마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궁궐에서 지낸 지 20여 년인데 혹여라도 다른 사람을 흘겨보지 않았다. 특별히 내전이 친애하여 내전은 빈의 죽음에 곡을 하고 매우 슬퍼하고 몹시 그리워하였으니, 남들보다 어진 점 또한 많지 않겠는가?

빈은 영종 29년 계유 7월 8일에 태어났고 향년 34세이다. 본관은 창녕이고 고려 중윤 인보(仁輔)가 비조이다. 중윤의 아들은 문하시중 송국(松國)이고 증손은 검교정승 문정공 여완(汝完)인데 우리 왕조(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이어받아 세상에서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으나, 그 뒤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 제릉 참봉 만종(萬種)이 막혀있던 벼슬길을 열어주었고 다시 삼대를 거쳐 군자감 정 경(景)이 관직에 올랐는데 바로 빈의 7대조와 고조부가 된다. 증 찬성 윤우(胤祐)와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는 빈의 부모인데 추증한 은전(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린 혜택)은 문효세자의 외가이기 때문이다.

저 여항의 비천한 땅에서 뛰어나고 현명한 사람이 나서 왕세자를 낳고 은총을 받아 빈의 작위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였다. 문효세자의 묘에 흙이 채 마르기 전에 빈 또한 뱃속의 아이와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나의 마음이 애통하고 마음이 아픈 것은 빈의 한 몸 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돌아간 지 석 달이 지나고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 자리에 안장되었고 문효의 묘와 백 보 정도 떨어져 있는데 빈의 소원을 따랐다. 죽어서도 안다면 애오라지 아주 가까이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의 본말을 묘지명으로 지어 무덤 속에 넣고 비석에 그 대략을 쓰노니, 뒤 사람들로 하여금 어진 빈을 애석하게 여기고 그 운명의 불행을 슬퍼하게 할 따름이다.[135]

어제의빈치제제문(御製宜嬪致祭祭文)

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직접 지은 어제 제문이고 1786년(정조 10년) 11월 7일[136]에 작성했다.[137]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內各祭祝文)

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발인부터 3년 탈상 후 담제까지 제사 때마다 지은 어제 제축문(御製 祭祝文)의 서식을 적었다.[138]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後各祭祝文)

의빈 성씨의 상장례를 모두 마치고 탈상한 후 1년 동안 지낸 각종 제사 때 정조가 작성한 어제 축문을 모은 것이다.[139]

조상

창녕 성씨(昌寧 成氏) 상곡공파 허백당계[140]

의빈 성씨의 조상
  • 11대 조부 : 예조판서 대제학 성현(禮曹判書 大提學 成俔, 허백당, 1439 ~ 1504)
  • 11대 조모 : 증 정경부인 한산 이씨(贈 貞敬夫人 韓山 李氏) - 상례 이숙(相禮 李塾)의 딸
  • 10대 조부 : 예조판서 대제학 성세창(禮曹判書 大提學 成世昌, 1481 ~ 1548)
  • 10대 조모 : 정경부인 전주 이씨(貞敬夫人 全州 李氏) - 장양부정 이주(長陽副正 李儔)의 딸
  • 10대 조모 : 정경부인 고성 이씨(貞敬夫人 固城 李氏) - 참판 이육(參判 李陸)의 딸
  • 9대 조부 : 증 참판 성해(贈 參判 成諧, 1497 ~ 1556)
  • 9대 조모 : 평산 신씨(平山 申氏) - 사성 신엄(司成 申儼)의 딸
  • 9대 조모 : 철성 이씨(鐵城 李氏) - 판관 이황(判官 李滉)의 딸
  • 8대 조부 : 현감 성자심(縣監 成子深)
  • 8대 조모 : 평산 신씨(平山 申氏) - 진사 신유(進士 申裕)의 딸
  • 7대 조부 : 제릉 참봉 성만종(齊陵 參奉 成萬種)[주 5]
  • 7대 조모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6대 조부 : 성운(成䉙)
  • 6대 조모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증 영의정 김응무(贈 領議政 金應武)의 딸
  • 5대 조부 : 노사직 성숙양(籚司直 成叔良)
  • 5대 조모 : 대구 백씨(大邱 白氏) - 계공랑 백수(啓功郎 白壽)의 딸
  • 고조부 : 군자감 정 성경(軍資監 正 成景)
  • 고조모 : 김해 김씨(金海 金氏) - 진사 김이남(進士 金爾南)의 딸
  • 증조부 : 증 이조참판 성근립(贈 吏曹參判 成謹立, 1639 ~ 1709)
  • 증조모 : 증 정부인 충주 유씨(贈 貞夫人 忠州 劉氏, 1645 ~ 1705) - 유효천(劉孝天)의 딸

가족관계

  • 조부 : 증 이조판서 성수산(贈 吏曹判書 成壽山, 1668 ~ 1749)[141]
  • 조모 : 증 정부인 김해 김씨(贈 貞夫人 金海 金氏, 1674 ~ 1698) - 통덕랑 김몽설(通德郎 金夢說)의 딸
  • 조모 : 증 정부인 창원 황씨(贈 貞夫人 昌原 黄氏, 1677 ~ 1747) - 현감 황상(縣監 黃晌)의 딸
    • 백부 : 성윤조(成胤祚)
    • 백모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현감 박성진(縣監 朴成震)의 딸
      • 사촌 : 성호(成灝)
      • 사촌 올케 : 경주 김씨(金海 金氏) - 김후석(金厚錫)의 딸
      • 사촌 : 성연(成淵)
      • 사촌 올케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심억(沈億)의 딸
    • 아버지 :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 1709 ~ 1769)
    • 전어머니 : 장흥 마씨(長興 馬氏, 1715 ~ ?) - 직장 마시행(直長 馬時行)의 딸[주 6]
    • 친어머니 :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 1722 ~ 1756) - 통덕랑 임종주(通德郞 林宗胄)의 딸
    • 새어머니 : 단양 지씨(丹陽 池氏)
의빈 성씨의 형제·조카·일가 친척
      • 오빠 : 성담(成湛, 1741 ~ 1783) - 무과(武科)
      • 새언니 : 성주 이씨(星州 李氏, 1739 ~ 1770) - 통덕랑 이후방(通德郞 李后芳)의 딸
      • 새언니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751 ~ 1799)
        • 조카 : 현감 성국민(縣監 成國民, 1766 ~ 1809)
        • 질부 : 강릉 유씨(江陵 劉氏, 1768 ~ 1809) - 유창연(劉昌淵)의 딸, 동지중추부사 유계조(同知中樞府事 兪啓祚)의 손녀
        • 조카 : 성희민(成羲民, 1780 ~ 1809)
        • 질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이학기(李學基)의 딸
      • 오빠 : 절충장군 성협(折衝將軍 成浹, 1742 ~ 1810)
      • 새언니 : 강릉 최씨(江陵 崔氏)
      • 새언니 : 단양 문씨(丹陽 文氏)
        • 조카 : 선략장군 성도민(宣略將軍 成道民)
        • 질부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박춘식(朴春植)의 딸
        • 조카 : 성호민(成皥民)
        • 질부 : 청주 한씨(淸州 韓氏) - 한종휴(韓宗休)의 딸
      • 오빠 : 부사용 성완(副司勇 成浣, 1743 ~ 1806) - 성식(成湜)에서 개명
      • 새언니 : 청주 한씨(淸州 韓氏, 1742~1794)
        • 조카 : 첨정 성순민(僉正 成舜民, 1763 ~ 1849)
        • 질부 : 단양 우씨(丹陽 禹氏) - 우세주(禹世疇)의 딸
        • 조카 : 성덕민(成德民, 1782 ~ 1828)
        • 질부 : 의령 남씨(宜寧 南氏, 1780 ~ 1812) - 남격(南格)의 딸
        • 조카 : 창녕 성씨(昌寧 成氏, 1776 ~?)
        • 질서 : 조상주 (趙尙周) - 한양 조씨(漢陽 趙氏)
      • 오빠 : 성숙(成淑)
      • 새언니 : 미상
        • 조카 : 성여민(成與民)
      •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 강덕순(康德淳) - 승평 강씨(昇平 康氏)
      •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 윤귀영(尹貴永) - 파평 윤씨(坡平 尹氏)[주 7]
        • 조카 : 윤인석(尹仁錫)
      • 동생 : 만호 성흡(萬戶 成洽, 1762 ~ ?) - 무과(武科)
      • 올케 : 금천 나씨(錦川 羅氏) - 나성찬(羅星燦)의 딸
        • 조카 : 성준민(成俊民)
    • 숙부 : 성연지(成淵祉)
    •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 정희규(鄭熙揆) - 연일 정씨(延日 鄭氏)
    •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 임성징(林聖徴) - 임천 임씨(林川 林氏)

창녕 성씨(昌寧 成氏) 족보 미등록

    • 고모 : 공조판서 정방(工曹判書 鄭枋, 1707~1789)의 첩[142]
      • 언니 : 영의정 홍낙성(領議政 洪樂性, 1718∼1798)의 첩[143]
      • 6촌 언니 : 정득환(鄭得煥, 1735 ~ 1771)[144]의 첩[145]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시조부 : 제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 ~ 1776, 재위 1724 ~ 1776)
  • 시조모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 ~ 1757)
  • 시조모 :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 ~ 1805)
  • 생시조모 : 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 ~ 1764)
    • 시부 : 추존 진종 소황제 (眞宗 昭皇帝, 1719 ~ 1728)
    • 시모 : 추존 효순소황후 조씨 (孝純昭皇后 趙氏, 1715 ~ 1751)
    • 생시부 : 추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 생시모 : 추존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 ~ 1815)
      • 남편 : 제22대 정조선황제 (正祖宣皇帝, 1752 ~ 1800, 재위 1776 ~ 1800)
        • 장남 : 문효세자 (文孝世子, 1782 ~ 1786)
        • 장녀: 옹주 (翁主, 1784년 윤달 3월 20일 ~ 1784년 음력 5월 12일)
        • 셋째 : 복중 사망 - 1786년 음력 10월 출산 예정[146]

관련 장소

거둥고개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로서, 정조가 효창원(孝昌園)에 거둥할 때 넘던 고개였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본래 의빈묘(宜嬪墓)와 효창원(孝昌園)이 한 영역에 있어서 정조는 효창원을 갈 때 의빈묘도 함께 방문했었다.[147]

홍예동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공덕동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은 효창공원이 된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인 효창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이름이었다. 효창원의 봉분을 멀리서 보면 홍예(무지개)처럼 보이기 때문에 홍예분(紅霓墳)이라고도 하였다.[148]

덕양구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무덤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데, 공교롭게도 의빈 성씨의 이름은 임이고 문효세자의 이름은 이다.

의빈이 등장한 작품(현대)

소설

연도제목역할
2005년비단속옷성연
2005년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강건희
2007년~2008년이산 정조대왕성송연
2017년우아한 환생의빈 성씨
2020년궐에서 사랑을 찾다성화리
2021년옷소매 붉은 끝동성덕임

드라마

연도방송사제목역할작가배우방송횟수시청률
1989년MBC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의빈 성씨신봉승정은숙28부작
2007년~2008년MBC이산성송연김이영이한나(아역) → 한지민(성인)77부작+스페셜 3회35.5%
2021년MBC옷소매 붉은 끝동성덕임정해리이설아(아역) → 이세영(성인)17부작17.4%

예능

방송일방송사제목역할배우
2017년 1월 1일MBC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46회 언빌리버블 스토리 '왕이 사랑한 여자'성덕임구민주(아역) → 김하영(성인)
2018년 1월 25일JTBC차이나는 클라스》 46회의빈 성씨
2019년채널A천일야사성덕임송도원

뮤지컬

연도주최주관제목역할배우
2016년수원시수원시립공연단정조-만천명월주인옹성선우홍민아

판소리

연도주최주관제목역할배우
2017년수원시수원문화재단정조가성덕임신유진

만화

날짜장르제목소제목작가역할
2018년 5월 26일네이버 웹툰조선왕조실톡311. 너같은 여자 처음이다무적핑크(변지민)성덕임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


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