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 시대 (베트남)

남북조 시대 (南北朝時代)는 베트남남조북조가 서로 대립하였던 시기를 말한다.

1570년, 북국인 막조(짙은 녹색)와 남국인 후레조(짙은 파랑) 위치.

부흥 운동

1531년 응우옌 낌(Nguyen Kim)은 응우옌 호앙 주의 아들로 타잉 호아에서 우위전전장군안청후(右衛殿前將軍安淸候)를 지내던 중, 막 태조의 찬탈 소식을 듣고 라오스로 피신하였다가 라오스왕의 도움을 받아 섬 쩌우에서 세력을 규합하였다. 1533년 후 레 소종의 막내 아들 후 레 장종을 찾아내어 즉위케 함으로써 후 레 왕조의 명맥을 잇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그의 복흥운동은 명실상부한 명분을 얻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그는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듬해에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막 태조의 제위 찬탈을 알리고 토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응우옌 낌은 썸 쩌우에서 8년 간 세력을 키운 다음 응에 안으로 진격하였다. 1543년 서도를 회복하는데 이어 2년 후에는 선 남과 옌 모현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투항했던 즈엉 쩝 녙(Duong Chap Nhat)에 의하여 응우옌 낌이 독살 당하자 병권은 사위였던 찡 끼엠(Trinh Kiem)에게 넘어갔다. 찡 끼엠은 군사를 타잉 호아로 물리고 투이 응우옌(Thuy nguyen)현 반 라이(Van lai)에 궁전을 짓고 막조에 저항하니, 이때부터 베트남은 남북으로 나뉘어 타잉호아 이남을 잇는 남조, 선남 이북을 잇는 북조 형태로 대치하는 남북조시대를 맞게 되었다.

남북조 대립

1547년 막 헌종이 사망하자, 막 선종이 자리를 이었다. 다시 1562년막머우헙이 제위에 올랐으나, 북조는 이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548년 레 장종의 사망 이후 당시에 후 레조의 모든 실권을 쥐고 있던 찡 끼엠은 후 레 중종을 태자로 삼아 제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때 남조의 궁전은 지금의 토 쑤언(Tho xuan)현에 속하는 안 쯔엉(An truong)으로 옮겨졌다. 즉위 8년 만에 레 중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찡 끼엠은 후 레 태조의 형 레 쯔의 현손으로 동 선(Dong son)현 보 베(Bo ve)사에 거하고 있던 후 레 영종으로 제위를 잇게 했다. 후 레조의 복흥운동이 성공하여 국가가 남북으로 나뉜 이후부터 양조는 통일을 목표로 치열한 전쟁에 돌입했다. 남조에서는 응우옌 낌 사후 모든 권한을 쥐게 된 찡 끼엠이 전쟁을 이끌어갔고, 북조에서는 막 선종의 숙부인 막 낑 디엠(Mac Kinh Dien)이 이를 담당하였다. 남조와 북조가 선 남과 타잉 호아로 각각 여섯 차례와 열 차례에 남진과 북진을 거듭했으나 전쟁은 결코 어느 쪽에도 승산이 없었다. 1570년 찡 끼엠의 사망으로 전권은 장남 찡 꼬이(Trinh Coi)가 잇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늘 주색에 빠지자 불만을 품은 장수들과 찡 꼬이의 동생 찡 뚱(Trinh Tung)은 형을 제거코자 레 영종을 호위하여 반 라이로 도망하였다. 이때 북조는 형제간의 분열을 틈타 타잉 호아로 남진하여 찡 꼬이를 사로잡으니, 찡 뚱은 보 베로 옮겨 북조에 대항하였다. 이후 북조군이 식량이 결핍하여 북으로 철수하자 남조의 전권은 다시 찡 뚱에게 넘어갔다. 레 영종은 북조를 물리친 데 대한 포상으로 찡 뚱을 장국공(長國公)에 봉하였다. 1583년 찡 뚱은 선 남에 진군하여 옌 모현과 옌 카잉현을 유린하고 많은 식량을 빼앗아 철수하였다. 이후 매년 그는 선 남에 진출하여 북조를 수세에 빠뜨렸다. 1591년 찡 뚱은 찡 반 하이, 태군공 응우옌 텉 리로 해구와 요해처의 방위를 강화하도록 한 후에 천자군 5만을 5열로 나누어 북진하였다. 북조의 막 영조는 4개 위군과 5개 부군의 10만 병사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탕 롱성 가까이에 접근한 남조는 구정을 맞아 잠시 정전에 들어갔다. 이때 막 영조는 자신의 전세가 불리하다고 깨닫고 막 응오 리엔, 부이 반 쿠에, 응우옌 꾸옌, 쩐 바익 니엔 등으로 탕 롱성을 사수케 한 다음 홍강을 건너 토 코이사로 후퇴하였다. 찡 뚱은 곧바로 탕 롱성을 탈환하였으나, 막 영조에 대한 더 이상의 공격없이 타잉 호아로 돌아왔다. 그의 타잉 호아로의 귀환에 대한 이유는 역사적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베트남의 남북통일

막 영조는 다시 탕 롱성으로 귀환했지만 여전히 주색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브이 반 쿠에의 아내 응우옌씨의 미모에 빠져 그녀를 취하고자 브이 반 쿠에를 살해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브이 반 쿠에는 아내를 데리고 찡 뚱에게 투항하였다. 찡 뚱은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티엔 파이강에서 막조의 병선 70척을 취하고 쩐 바익 니엔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찡 뚱이 탕 롱성에 접근하자 막 영조는 낌 타잉으로 진격하여 도망하였다. 응우옌 텉 리, 브 반 쿠에 등은 낌 타잉으로 진격하여 수많은 은금을 취하고, 막 영조의 모친을 붙잡는 전과를 올렸다. 위협을 느낀 막 영조는 제위를 아들 막 또안에게 양위하고 친히 군사를 지휘하여 남조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는 패하여 프엉 년(Phuong)현의 한 절에 은신하다가 반 코아이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1592년) 이로써 후 레조의 복흥운동은 성공하였고, 베트남은 다시금 통일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군주

후 레 왕조

막 왕조

그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