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추경

대한민국의 축구인 (1950-2007)

최추경(崔秋景, 1950년 8월 20일 ~ 2007년 5월 17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다. 감독으로서는 정신력을 중시하며 스피드와 체력을 바탕으로 한 축구를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2][3][4] 적절한 세대 교체와 베테랑들의 기용으로 인한 신구 조화를 바탕으로 여자 국가대표팀의 수준을 상당 부분 성장시켰다고 평가되었다.[5][6][7]

최추경
(崔秋景)
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Choi Chu-Kyung
출생일1950년 8월 20일(1950-08-20)
출생지대한민국 경상남도 함안군
사망일2007년 5월 17일(2007-05-17)(56세)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포지션감독
청소년 구단 기록
???
???
마산공업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지도자 기록
연도
1986-1990
1990-1993
1990
1993
1993-1996
1997-2001
2002-2007
2003-2007
2004
인천전문대학
인천전문대학 여자
한국대학축구연맹 (홍보이사)
한국대학축구연맹 (기술이사)
대한축구협회 (여성위원장)
울산과학대학교 여자
대교 캥거루스
한국여자축구연맹 (부회장)
대한민국 여자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선수 경력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출신으로[8] 마산상업고등학교 축구부에서 활약했으며, 1970년부터 중앙대학교 축구부에서 활약하였다.

지도자 경력

1970년 중앙대학교 진학 후 축구 선수로 성인 무대 데뷔에 실패하자 잠시 축구계를 떠났다. 이후 1979년 인천전문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1986년부터 인천전문대학 축구부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며,[9][10] 1990년 인천전문대학 여자 축구부의 창단 감독으로 임명되어 1993년 팀이 해체될 때까지 활동하였다.[11] 또한 1990년 한국대학축구연맹 홍보이사를 역임했으며,[12] 1993년 기술이사로 자리를 옮겼다.[13] 그리고 1993년 대한축구협회의 이사로 선임된 이후 여성위원장을 지냈으며,[14][15] 같은 해 섭외담당자 자격으로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최된 '평화기원축구대회'에 참가하는 '대학 상비군'의 출국에 동행하였다.[16] 그 뒤 같은 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정비 문제로 신설된 기술위원회 산하 '소위원회'의 일원으로 합류한 뒤 새로 구성된 기술위원에 포함되었으며,[17][18] 1993년 AFC 여자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단장을 맡았다.[19]

이후 1997년 새로 구성된 대한축구협회 집행부에서는 여성위원장에서 물러났으나 이사 자리를 유지했으며,[20]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울산과학대학교 여자 축구부의 감독으로 활동하였다.[21] 또한 2000년 '2002년 FIFA 월드컵 조직위원회'의 부위원장 및 경기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22] 월드컵 종료시까지 월드컵에 참가하는 각 대표팀이 이용할 캠프의 준비 및 관리를 담당하였다.[23][24][25] 그 뒤 2002년 대교 캥거루스가 창단하자 원년 감독으로 합류했으며,[26][27]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 및 여자 축구 활성화에 대한 공로로 2002년 '대한민국 축구대상 시상식'에서 여자축구 공로상을 받은 뒤 체육훈장 백마장을 수여받았다.[28][29] 이후 2003년 새로 한국여자축구연맹 회장으로 취임한 이의수 산하 집행부에서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30] 2004년에는 2004년 하계 올림픽 예선을 앞두고 대한민국 여자 국가대표팀의 감독 후보 중 한 명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도중 사임하는 진통을 겪었고 최종적으로 결국 최추경이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31][32] 그리고 최종 예선에서는 미얀마를 상대로 승리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에 패해 조 2위로 4강에 진출했으며,[33][34][35] 4강에서 다시 한 번 중화인민공화국을 상대로 패배를 기록하며 올림픽 본선 진출이 좌절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3-4위전에서도 져 4위로 마감하였고 최종 예선 이후 본선 진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팀 감독에서 사임하였다.[36][37][38] 하지만 같은 해 대교 캥거루스 선수들에게 스파르타식 훈련을 강행하다 선수들이 불만을 품고 무단 이탈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으며,[39] 2004년 '경상남도 체육상' 지도상을 받았다.[40]

그 뒤 2007년 한국여자축구연맹 '리그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41] 그 해 통일대기 전국여자종별축구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자상을 수상하였다.[42]

사망

2006년부터 담낭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2007년 5월 17일 세상을 떠났으며,[43][44] 장례는 한국여자축구연맹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경기도 고양시 해인사 미타원에 안장되었다.[45]

기타

1978년 '고등학교 학생의 여가활동 실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작성해 중앙대학교 체육행정학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46] 이후 인천전문대학 체육행정학과의 교수로 재직하가도 했다.[47]

1998년 사비 4억여원을 들여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함주공원 터에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연수원인 '함안축구연수원'을 설립했으며,[48] 2001년 함안군 군북면 사촌초등학교 터에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 학교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다.[49]

2002년 FIFA 월드컵 당시 구성된 '조직위원회'의 축구 동호회에서 공격수로 활약했으며,[50] 폴란드와의 조별 라운드 1차전을 앞두고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의 경기장 상태를 대한민국에 유리하게 조성하며 국가대표팀의 4강 진출에 일조하였다.[51]

2004년 하계 올림픽 예선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대표팀과의 경기를 앞두고 중화인민공화국 기자들의 막말 취재를 당하기도 했다.[52][53]

대교 캥거루스의 감독으로 취임한 뒤 폭넓은 중화인민공화국 인맥을 활용해 대교 기업의 중화인민공화국 시장 진출에 기여하였고, 이러한 공로로 2005년 대교의 상무이사로 승진하였다.[54][55]

안익수와는 인천전문대학 시절 스승과 제자 사이로[56] 인연을 쌓았으며, 2006년 안익수가 성남 일화 천마의 코치를 사임한 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려 하자 본인이 지휘하던 대교 캥거루스의 수석 코치로 영입하였고 최추경 사후 안익수가 뒤를 이어 팀의 차기 감독이 되었다.[57][58]

지도자 기록

수상 경력

감독

개인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