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경제적 불황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이 세계 스포츠의 주도권을 확고히 한 대회로, 20년 전인 제4회 올림픽 경기대회(런던)에 비해 참가국 수는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원래 암스테르담은 제8회 하계 올림픽 대회 개최지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1924년으로 임기가 끝나는 피에르 쿠베르탱에 대한 경의와 존중의 표시로 파리에 양보를 하고 제9회 대회를 열게 되었다.
네번째 후보 만에 어렵게 올림픽 주최권을 따낸 네덜란드는 준비 벽두부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가톨릭 계층은 고대 무신교에서 발원한 올림픽이 기독교 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일요일에 경기를 치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고, 정부에도 압력을 가해 재정 지원을 막았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여러 신문에서 올림픽의 기본 정신을 설득하면서 여론을 유도했고, 국민들의 성금, 식민지를 통한 재정 지원을 받아 준비에 착수해 가까스로 올림픽을 치를 수 있었다.